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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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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2세는 1284년 웨일스에서 태어났으며, 1307년부터 1327년까지 잉글랜드 왕국을 통치했다. 그는 승마와 시를 즐기는 교양인이었으나, 수영과 도랑 파기와 같은 취미는 왕위 계승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피어스 개비스턴을 총애하여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권위가 실추되었다. 결국 왕비 이사벨라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국왕으로 평가받으며, 동성애적 관계에 대한 논란으로도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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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드워드 2세의 무덤 조각상 세부 모습
글로스터 대성당에 있는 에드워드 2세의 무덤 조각상
이름에드워드 2세
원어 이름Edward II
출생일1284년 4월 25일
출생지카나번 성, 귀네드, 웨일스
사망일1327년 9월 21일
사망지버클리 성, 글로스터셔, 잉글랜드
매장일1327년 12월 20일
매장지글로스터 대성당, 글로스터셔
통치
왕국잉글랜드 왕국
재위 기간1307년 7월 7일 – 1327년 1월 25일
대관식1308년 2월 25일
선임자에드워드 1세
후임자에드워드 3세
기타 작위아키텐 공작
퐁티외 백작
아일랜드 영주
웨일스 공 재위1284년 8월 19일-1307년 7월 7일
웨일스 공 대관식1301년 2월 7일
웨일스 공 선임자다비드 압 그리피드
웨일스 공 후임자우드스톡의 에드워드
웨일스 공 군주에드워드 1세
가문
왕가플랜태저넷 왕가
아버지에드워드 1세
어머니엘리노어 데 카스티야
결혼과 자녀
배우자이사벨 드 프랑스 왕녀 (1308년 결혼)
자녀에드워드 3세, 잉글랜드 왕
존, 콘월 백작
엘리너
조앤, 스코틀랜드 왕비
아담 피츠로이 (서자)
기타 정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참전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배넉번 전투

2. 생애

에드워드 2세는 왕자 시절 승마를 즐기고 시와 연극을 좋아하는 등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다.[402] 그러나 수영, 도랑 파기 등은 왕위 계승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취미로 여겨져 비판받았다.[402]

에드워드 2세는 신분이 낮은 기사 피어스 개버스턴(Piers Gaveston)을 총애하여 특혜를 베풀었다. 에드워드 1세는 아들과 개버스턴의 관계를 우려하여 개버스턴을 국외로 추방했지만, 에드워드 2세는 즉위 후 개버스턴을 불러 콘월 백작 직위를 수여했다.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음에도 개버스턴을 총애하여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의회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중심으로 칙령기초위원회를 조직, 에드워드 2세를 겨냥한 40여 개의 칙령을 선포했고, 그중 20개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겨냥한 것이었다.[403] 이로 인해 피어스는 잉글랜드에서 무기한 추방당하고 왕의 인사권도 대폭 제한되었다.[403] 이후 개버스턴은 밀입국을 시도하다 귀족들에게 발각되어 1312년 6월 19일 참수당했다.

1314년, 에드워드 2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나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 대패했다.[403] 이로 인해 왕과 의회의 불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의회파가 분열되자 에드워드 2세는 추종자들을 결집하여 토머스와 의회에 강경하게 대처했고, 1322년 3월 버러브리지에서 토머스와 의회파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칙령을 파기했다.

1326년, 왕비 이사벨라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조직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왕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처형당했고, 에드워드 2세는 무능함과 칙령 파기 책임을 물어 탄핵당하고 폐위되었다. 이후 에드워드는 1327년 9월 감옥에서 폭행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어린 시절

에드워드 2세는 1284년 4월 25일,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지역을 정복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카나번 성(Caernarfon Castle)에서 태어났다. 그 결과 그는 때때로 카나번의 에드워드라고 불리기도 한다.[12] 왕은 에드워드의 탄생 장소로 성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이곳은 로마 제국 시대의 역사와 관련된 원주민 웨일스인들에게 중요한 상징적인 장소였고, 북웨일스의 새로운 왕실 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13] 에드워드의 탄생은 당대의 예언자들로부터 위대함을 예측하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 날이 임박했다고 믿었고, 그를 영국을 영광으로 이끌 새로운 아더왕이라고 선언했다.[14]

카나번 성 사진
카나번 성


에드워드의 이름은 기원이 영어로, 그를 앵글로색슨의 성인에드워드 참회왕과 연결시켰으며, 그의 아버지가 에드워드의 형제들에게 선택된 보다 전통적인 노르망디어와 카스티야어 이름 대신 선택한 이름이었다.[16] 에드워드가 태어나기 전에 존과 헨리가 사망했고, 1284년 8월에는 체스터 백작 알폰소(Alphonso, Earl of Chester)가 사망하여 에드워드를 왕위 계승자로 남겼다.[17] 에드워드는 비교적 건강한 아이였지만, 그의 어린 시절 내내 그 역시 죽어 아버지에게 남자 상속인을 남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지속적인 우려가 있었다.[17]

에드워드는 왕족으로서 평범한 성장 과정을 거쳤다.[25] 그는 말과 말 사육에 관심이 있었고, 훌륭한 기수가 되었으며, 개, 특히 그레이하운드를 좋아했다.[27] 그는 14세기에 인기 있었던 사냥이나 매사냥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29] 그는 웨일스 음악과 새로 발명된 크르스 악기뿐만 아니라 파이프 오르간을 포함한 음악을 즐겼다.[30] 그는 재능이 부족하거나 개인적인 안전을 위해 참여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조스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 스포츠를 열렬히 지지했다.[31]

에드워드는 키가 크고 근육질이었으며, 당시 기준으로 잘생겼다고 여겨졌다.[32] 특이하게도 그는 조정뿐만 아니라 생울타리도랑을 파는 것을 즐겼고, 노동자들과 다른 하층 계급 노동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402] 이러한 행동은 당시 귀족들에게는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동시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402]

1294년에 그는 피어스 개비스턴을 친구로 삼아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301년, 아버지는 잉글랜드 지배하의 웨일스의 민심을 장악하기 위해 러웰린 압 그리피스가 소유하고 있던 웨일스 공(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칭호를 에드워드에게 수여했다. 이후 이 칭호는 잉글랜드/영국의 황태자에게 주어지는 전통이 되었다.

2. 2. 총신 정치와 귀족과의 갈등

에드워드 2세는 왕자 시절 승마, 시,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402] 그러나 수영, 도랑 파기 등 왕위 계승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취미로 비판받기도 했다.[402]

에드워드 2세는 신분이 낮은 기사 피어스 개버스턴을 총애하여 과도한 특혜를 베풀었다. 에드워드 1세는 개버스턴을 국외로 추방했지만, 에드워드 2세는 즉위 후 그를 불러들여 콘월 백작 직위를 수여했다. 이사벨라와 결혼 후에도 개버스턴을 총애하여 의회와 마찰을 빚었다.

의회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중심으로 칙령기초위원회를 조직하여 40여 개의 칙령을 선포했는데, 그중 20개는 개버스턴을 겨냥한 것이었다.[403] 이로 인해 개버스턴은 추방당하고 왕의 인사권도 제한되었다.[403] 이후 개버스턴은 밀입국을 시도하다 귀족들에게 발각되어 1312년 6월 19일 참수당했다.

1314년, 에드워드 2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나,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 대패했다.[403] 이로 인해 왕과 의회의 불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의회파가 분열되자 에드워드 2세는 1322년 3월 버러브리지에서 토머스와 의회파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칙령을 파기했다.

1326년, 왕비 이사벨라가 망명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에드워드 2세는 폐위되었고, 1327년 9월 감옥에서 폭행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3. 스코틀랜드와의 전쟁과 실정

에드워드 2세는 왕자 시절 승마, 시, 연극 등을 즐기는 교양인이었으나, 수영, 도랑 파기 등 왕위 계승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취미로 비판받았다.[402] 그는 신분이 낮은 기사 피어스 개버스턴(Piers Gaveston)을 총애하여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에드워드 1세는 개버스턴을 국외로 추방했지만, 에드워드 2세는 즉위 후 그를 불러들여 콘월 백작 직위를 수여했다. 이사벨라와 결혼 후에도 개버스턴을 총애하여 의회와 마찰을 빚었다. 의회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중심으로 칙령기초위원회를 조직, 40여 개의 칙령을 선포했는데, 그중 20개는 개버스턴을 겨냥한 것이었다.[403] 이로 인해 피어스는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하고 왕의 인사권도 제한되었다.[403] 이후 개버스턴은 밀입국을 시도하다 귀족들에게 발각되어 1312년 6월 19일 참수당했다.

1314년, 에드워드 2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나,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 참패했다.[403] 이로 인해 왕과 의회의 불화는 심화되었다. 그러나 의회파가 분열되자 에드워드는 추종자들을 결집, 토머스와 의회를 강경하게 대처했다. 1322년 3월, 토머스와 의회파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그들이 제정한 칙령을 파기했다.

1310년, 국왕과 의회는 스코틀랜드 정책에 대한 논의 대신 국내 문제로 논쟁하였다.[120] 에드워드는 가베스턴을 그의 고문으로 버리고, 정부와 왕실 가정의 광범위한 개혁을 수행할 선출된 21명의 귀족, 이른바 조례 제정자(Ordainers)의 조언을 받아들일 것을 청원받았다.[121] 엄청난 압력 아래, 그는 제안에 동의했고, 조례 제정자들이 선출되었는데, 개혁가와 보수파가 거의 균등하게 나뉘었다.[122] 조례 제정자들이 개혁 계획을 시작하는 동안, 에드워드와 가버스턴은 약 4,700명의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갔는데, 그곳의 군사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123] 로버트 브루스는 전투를 거부했고, 1311년에 보급품과 자금이 바닥나면서 에드워드가 남쪽으로 돌아가도록 강요할 때까지 겨울 동안 무효한 전역이 진행되었다.[124]

1311년 조례(Ordinances of 1311)에는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을 수행하거나 토지를 부여할 수 있는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의회가 왕실 행정을 통제하며, 징발 제도를 폐지하고, 프레스코발디 은행가들을 배제하며, 조례 준수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126]

개스턴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상당히 다양했다.[142] 에드워드는 개스턴의 살해로 여긴 사건에 대해 격분하고 깊이 낙담했으며, 개스턴의 가족을 위한 조치를 취하고 관련 귀족들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143] 펨브룩 백작과 서리 백작은 워릭의 행동에 당황하고 분노하여 그 후 에드워드를 지지하기 시작했다.[144]

배넉번 전투의 스케치
1320년에서 1330년 사이에 제작된 홀크햄 성서에 묘사된 배넉번 전투


1314년까지 로버트 더 브루스는 에드워드 2세가 한때 점령했던 스코틀랜드의 성 대부분을 탈환하고, 카라일까지 북쪽 잉글랜드에 약탈 부대를 파견했다.[155] 이에 대한 대응으로 에드워드는 랭커스터와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군사 작전을 계획했고, 1만 5천 명에서 2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다.[156] 한편 로버트는 스코틀랜드의 주요 요새인 스털링 성을 포위했다. 영국군 사령관은 6월 24일까지 에드워드가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155] 이 소식은 5월 말에 왕에게 전해졌고, 그는 버윅어폰트위드에서 북쪽으로 진군을 서둘러 성을 구원하기로 결정했다.[157] 로버트는 주로 창병으로 구성된 5,500명에서 6,500명의 병력으로 에드워드의 군대가 스털링에 도착하는 것을 막을 준비를 했다.[158]

전투는 6월 23일 영국군이 습지로 둘러싸인 배넉번의 고지대를 통과하려고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159] 양측 간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여 로버트가 일대일 전투에서 직접 사살한 헨리 드 보훈 경이 사망했다.[159] 에드워드는 다음 날에도 진격을 계속하여 뉴 파크의 숲에서 나온 스코틀랜드군 본대와 조우했다.[160]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군이 여기서 전투를 벌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으며, 그 결과 그의 군대는 전투 태세가 아니라 행군 태세를 유지했고, 일반적으로 적의 창병 진형을 붕괴시키는 데 사용되는 궁수들은 군대 후방에 배치되었다.[160] 그의 기병은 협소한 지형에서 작전하기 어려웠고 로버트의 창병들에게 격파당했다.[161] 영국군은 압도당했고 지휘관들은 통제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161]

배넉번 전투의 참패 이후 랭커스터 백작과 워릭 백작은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고, 에드워드 2세에게 1311년 조례를 재실시하도록 압력을 가했다.[165]

에드워드 2세의 어려움은 대기근의 일부로 악화되었다. 1314년 말 폭우가 내린 후 매우 추운 겨울과 이듬해 봄의 폭우로 많은 양과 소가 죽었다. 악천후는 1321년까지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어 연이은 흉작을 초래했다.[168]

2. 4. 디스펜서 부자의 등장과 몰락

에드워드 2세는 왕자 시절 승마, 시, 연극 등을 즐기는 교양인이었지만, 수영이나 도랑 파기 같은 취미는 왕위 계승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402] 그는 신분이 낮은 기사 피어스 개버스턴을 총애하여 많은 특혜를 베풀었는데, 이는 에드워드 1세의 우려를 사 개버스턴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즉위 후 개버스턴을 불러들여 콘월 백작 직위를 수여하고, 이사벨라와 결혼 후에도 변함없이 총애하여 의회와 마찰을 빚었다.

의회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중심으로 칙령기초위원회를 조직, 40여 개의 칙령을 선포했는데, 그 중 20개는 개버스턴을 겨냥한 것이었다.[403] 이로 인해 개버스턴은 추방되고 왕의 인사권도 제한되었다.[403] 이후 개버스턴은 밀입국을 시도하다 귀족들에게 발각되어 1312년 6월 19일 참수되었다.

1314년, 에드워드 2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으나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에게 참패했다.[403] 이로 인해 왕과 의회의 불화는 심화되었지만, 의회파가 분열되자 에드워드 2세는 추종자들을 결집하여 1322년 3월 버러브리지에서 토머스와 의회파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고 칙령을 파기했다.

2대 토마스, 4대 험프리 드 보운, 9대 에드먼드 피츠앨런 등 귀족들이 개버스톤을 사형으로 참수하는 장면 (''A Chronicle of England'', 1864년)


1310년 의회에서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를 비판하고 정치 개혁을 요구했고, 에드워드 2세는 개혁 칙령 기초 위원회 설치를 인정했다. 1311년 가을, 1311년 개혁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개빈스톤의 영구 추방.
  • 에드워드 2세 즉위 후 이루어진 왕령지 증여 취소.
  • 1294년 이후 제정된 관세 폐지.
  • 왕을 의회의 관리하에 두고 왕의 집행권, 인사권, 행동의 자유 제한.
  • 1년에 1회 또는 2회 의회 소집.
  • 마그나 카르타와 숲의 헌장의 해석권은 의회의 귀족에게 부여.


개빈스톤은 추방 전 플랑드르로 도망쳤다가 몰래 귀국하여 에드워드 2세와 합류, 추방 처분 취소를 받았다. 분노한 귀족들은 윈저로 진군했고, 에드워드 2세와 개빈스톤은 스카버러 성에서 3주 동안 버텼지만 결국 항복했다. 에드워드 2세의 중재로 개빈스톤의 목숨은 보장되었지만, 영구 추방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가이 드 비첨과 2대 토마스 등 귀족들이 독단으로 개빈스톤을 강탈하여 참수했다. 에드워드 2세는 분개했고, 귀족들의 연합은 깨졌다. 내란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왕세자 에드워드 3세의 출생으로 위기는 모면되었다.

1314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스털링이 포위되자 직접 원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출병했지만, 배넉번 전투에서 참패했다. 에드워드 2세는 권위가 더욱 저하되었고, 랭커스터 백작이 정부 지도권을 장악했다. 1316년 2월 의회에서 랭커스터 백작에게 정권을 맡겼지만, 그는 소극적인 국정 운영으로 고립되었다. 한편 궁정에서는 휴 디스펜서 장로와 그의 아들 휴 디스펜서 차남이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았다.

1321년 내전이 발발했다.[183] 귀족들과 디스펜서 가문 사이의 긴장이 전쟁의 도화선이었다.[184] 휴 디스펜서 장로는 에드워드 부자를 섬겼고, 휴 디스펜서 차남은 왕의 내시가 되었으며, 1317년 글러모건을 얻었다.[185] 휴 차남은 웨일스 전역에서 영지와 권력을 확장했다.[186] 랭커스터 백작과 디스펜서 가문은 맹렬한 적이었고, 랭커스터의 반감은 헤리퍼드 백작, 모티머 가문 등이 공유했다.[187] 에드워드는 디스펜서 가문의 조언과 지원에 의존했고, 특히 휴 차남과 매우 가까웠다.[188]

디스펜서 부자의 총애는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1321년에 국외 추방당했지만, 이듬해 국왕에 의해 다시 불려들였다. 랭커스터 백작 등 귀족들은 디스펜서 추방을 요구하며 봉기했으나, 펨브룩 백작 등 랭커스터 백작과 대립하는 귀족들이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랭커스터 백작은 1322년 3월 보로브리지 전투에서 왕군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이 승리로 궁정 세력(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부자)은 권력을 회복했고, 1322년 요크에서 열린 의회에서는 이전의 개혁 칙령을 폐지할 수 있었다. 휴 디스펜서 차남은 에드워드 2세로부터 실무를 맡아 영지를 계속 확장했고, 뇌물로 사리사욕을 채웠다. 휴 디스펜서 장로는 윈체스터 백작에 서임되었다.

이후 5년 동안 디스펜서 부자가 국정을 주도했지만, 이 기간 동안 디스펜서 부자의 횡포에 대한 원망은 커져갔다. 특히 웨일스에서의 영토 확장은 웨일스 국경 지방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1324년 9월에는 왕비 이사벨라의 영지가 몰수됨으로써 디스펜서 부자는 왕비마저 적대시하게 되었다.

2. 5. 왕비 이사벨라의 반란과 폐위

1322년 샤를 4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에드워드 2세는 생트사르두스 전쟁의 전후 처리로 아키텐 영유를 계속하기 위해 아키텐 공작으로서 샤를 4세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 방문을 꺼리고 대신 왕비 이사벨라와 왕세자 에드워드를 프랑스에 보냈다.[291]

이사벨라는 디스펜서 부자를 추방하지 않으면 왕세자와 함께 프랑스에 머무르겠다며 귀국을 거부했다. 당시 파리에는 디스펜서 부자에게 추방당한 잉글랜드 귀족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웨일스 변경백 중 한 명인 초대 머치 백작 로저 모티머도 있었다. 이사벨라는 모티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남편을 폐위시킨 뒤 왕세자에게 왕위를 계승시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131][291]

1326년 9월, 이사벨라와 모티머가 모은 기사들이 잉글랜드 동부 서퍽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군했다. 인기 없던 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부자는 지지 기반을 잃었고, 각지에서 왕비군은 환영받았다. 런던 시도 왕비 편에 섰다. 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부자는 도망쳤으나 모두 체포되었다. 디스펜서 부자는 처형되었고, 에드워드 2세는 케닐워스 성에 유폐되었다.[132][292]

1327년 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의회는 1322년 요크 의회와 마찬가지로 주와 도시 대표를 다수 포함하고 있었고, 웨일스 대표도 참석하여 대의제적인 성격이 강했다.[292] 반(反) 왕당파 주교들은 설교단에서 국왕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며 국왕 폐위 여론을 조성했다.[292]

의회는 에드워드 2세의 폐위를 결의했다. 에드워드 왕세자(에드워드 3세)가 새 국왕으로 지명되었으나, 왕세자는 아버지로부터 정식 양위 문서 없이는 왕위 계승을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에 의회는 1월 20일 케닐워스 성에 대표를 보내 에드워드 2세에게 양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의회의 폐위 결정을 듣고 절망하여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수락 의사를 밝히고 서명했다고 한다.[133] 1월 25일 의회 대표자는 "에드워드 2세에 대한 모든 신하의 의무와 충성을 버린다"는 선언을 발표했다.[292]

이러한 폐위 과정에서 의회의 결의라는 수단이 사용된 것은, 왕국의 여러 신분의 대표가 모이는 회합에서 표명되는 국민의 총의가 왕위조차 좌우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영국 입헌주의에 큰 의의를 가진다.[293]

이후 에드워드 2세는 케닐워스 성에서 버클리 성으로 옮겨져 감금이 계속되었다.[134]

3. 유산과 평가

에드워드 2세는 국왕으로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가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그를 "게으르고 무능하며, 사소한 문제에는 쉽게 화를 내지만, 중요한 문제에는 결단력이 없는" 인물로 묘사했고, 로이 헤인즈는 "무능하고 잔혹하며, 사업가 기질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336] 그는 일상적인 정무뿐만 아니라 고위급 의사결정까지 신하들에게 위임했는데, 피에르 샤플레는 이를 두고 "무능한 국왕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국왕"으로서 피어스 개스턴이나 휴 데스펜서 더 영거와 같은 강력한 대리인을 통해 통치하기를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37]

에드워드 2세는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부채 중 약 6만 파운드가 1320년대에도 미지급 상태였다.[341] 그는 여러 재무관을 거쳤지만, 이들 중 일부만이 오래 재임했으며, 인기 없는 세금 징수와 물품 징발을 통해 세수를 늘리려 했다.[342] 프레스코발디 가문과 은행가 안토니오 페사뇨를 통해 많은 대출을 받기도 했다.[342] 에드워드 2세는 통치 말기에 재정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며 관리들을 불신하여 가계 비용을 직접 삭감했다.[343]

왕실 사법 집행은 판사와 관리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344] 에드워드 2세가 여기에 얼마나 개인적으로 관여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초기에는 어느 정도 개입했고 1322년 이후에는 더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345] 그는 자신의 주장과 총신들을 변호할 때 로마 민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는데, 이는 영국 관습법 원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겨져 비판을 받기도 했다.[346] 에드워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무장 갱단과 폭력이 영국 전역에 확산되었고, 아일랜드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348]

에드워드 2세의 통치 아래, 의회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청원에 응답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성장했지만, 역사가 클레어 발렌테는 "여전히 제도라기보다는 사건에 가까웠다"고 지적한다.[349] 1311년 이후, 의회는 귀족 외에도 기사와 시민 대표자들을 포함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훗날 하원을 구성하게 된다.[350]

에드워드 2세의 궁정은 순회하는 형태였으며, 그와 함께 전국을 여행했다.[354] 궁정의 중심에는 "홀"과 "침실"로 나뉘는 왕실 가족이 있었는데, 1317년에는 가족 기사, 무관, 주방 및 운송 직원을 포함하여 약 500명 규모였다.[356]

음악과 음유시인은 궁정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사냥은 덜 중요한 활동이었고, 기사도적 행사는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358] 에드워드 2세는 건물과 그림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문학 작품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궁정에서 문학 후원도 광범위하지 않았다.[359] 그는 낙타를 애완동물로 길렀고, 젊은 시절에는 스코틀랜드 원정에 사자를 데려가기도 했다.[361]

에드워드 2세의 종교적 태도는 당시 기준으로 평범했으며, 역사가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그를 "전적으로 관습적인 종교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묘사한다.[364] 그는 교육을 도운 도미니크 수도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통치 기간 동안 대학 확장을 지원하여 캠브리지에 킹스 홀을 설립해 종교법과 민법 교육을 장려하고, 옥스퍼드에 오리엘 칼리지를, 더블린에 단명한 대학을 설립했다.[366]

오리엘 칼리지에 에드워드 2세가 하사한 1326년 헌장

3. 1. 부정적 평가

에드워드 2세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국왕으로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36] 그는 일상적인 정무는 물론 고위급 의사결정까지 신하들에게 위임했는데, 이는 그가 "무능한 국왕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국왕"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337]

에드워드 2세는 총애하는 신하들을 지나치게 승진시켜 정치적 문제를 야기했다.[338] 또한 재정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인기 없는 세금 징수와 물품 징발 등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다.[342] 왕실 사법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자신의 총애하는 신하들이 이를 악용하도록 방치했다는 비판도 받았다.[346][347]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전역에 무장 갱단과 폭력이 확산되었고, 아일랜드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348]

에드워드 2세는 양성애자[398]라는 소문이 있었으며, 개비스턴 및 디스펜서와의 관계 때문에 그들을 등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러한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는 영국 역사상 최악의 왕 중 하나로 불리게 되었다.[336]

3. 2. 동성애 논란

에드워드 2세가 피어스 개스턴이나 그의 후원자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에 대해 역사가들은 광범위하게 논의해 왔는데, 그들의 관계의 세부 사항을 확실히 밝힐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여 복잡하다.[63] 14세기 잉글랜드에서 동성애는 교회에 의해 맹렬하게 비난받았는데, 그것은 이단과 동일시되었다.[65] 두 사람 모두 아내와 성관계를 맺었고, 자녀를 낳았다. 에드워드는 또한 사생아를 두었고, 그의 조카딸인 엘레노어 드 클레어와 불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도 있다.[66]

그들의 동성애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당대의 증거는 주로 1320년대의 익명의 연대기 작가가 에드워드가 개스턴에게 "그런 사랑을 느꼈다"고 묘사한 것에서 나온다. "그는 변치 않는 계약을 맺고,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서 풀 수 없는 사랑의 유대로 자신을 그에게 묶었다. 굳건히 세워지고 매듭으로 묶여진 유대다."[67] 에드워드가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최초의 구체적인 제안은 1334년 윈체스터 주교인 아담 오를레톤이 1326년 에드워드가 "소도미스트"라고 말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때 기록되었다. 그러나 오를레톤은 자신이 고인이 된 국왕이 아니라 에드워드의 고문인 휴 데스펜서 더 영거가 소도미스트라고 말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다.[68] 1390년대의 모 연대기는 단순히 에드워드가 "소도미의 악덕에 너무 탐닉했다"고 적고 있다.[69]

반대로, 에드워드와 개스턴은 단순히 긴밀한 업무 관계를 가진 친구였을 수도 있다.[70] 당대 연대기 작가의 논평은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를레톤의 주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정치적으로 동기가 부여되었으며, 각각 1303년과 1308년에 보니파시오 8세와 템플 기사단에 대해 제기된 고도로 정치화된 소도미 혐의와 매우 유사하다.[71] 에드워드의 활동에 대한 후대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은 오를레톤의 원래 주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에드워드 통치 말기에 발생한 사건들에 의해 분명히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72] 마이클 프레스위치와 시모어 필립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영국 왕실의 공개적인 성격 때문에 동성애적 관계가 비밀리에 유지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당대 교회, 에드워드의 아버지, 장인 모두 에드워드의 성적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한 것 같지 않다.[73]

역사가 피에르 샤플레가 제안한 최근 이론은 에드워드와 개스턴이 입양 형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74] 참가자들이 "무장 형제애"의 형태로 서로를 지지할 것을 서약하는 입양 형제애 계약은 중세 시대의 가까운 남성 친구들 사이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75] 많은 연대기 작가들은 에드워드와 개스턴의 관계를 형제애로 묘사했고, 한 명은 에드워드가 개스턴을 입양 형제로 삼았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했다.[76] 샤플레는 두 사람이 1300년이나 1301년에 공식적인 계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들은 나중에 서로 헤어지거나 떠나기로 한 약속은 압력 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77]

에드워드 2세는 양성애자[398]라는 소문이 있었고, 개비스턴과 디스펜서의 아들과 관계가 있어 그들을 등용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3. 3. 헌정사적 의의

19세기 말, 윌리엄 스터브스(William Stubbs), 토마스 투(Thomas Tout), J. C. 데이비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의 헌법 및 정부 체제가 발전한 것에 주목했다.[380] 이들은 더 많은 행정 기록을 활용하여 연구를 진행했으며, 에드워드 2세가 왕으로서 부적절했다고 비판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의회의 역할이 커지고 왕권이 약화된 것은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강조했다.[381]

1970년대 이후, 당시 기록들이 추가로 출판되면서 에드워드 2세 통치에 대한 역사 연구는 이전의 모델에서 벗어났다.[380] 제프리 덴턴, 제프리 해밀턴, 존 매디콧(John Maddicott), 시모어 필립스(Seymour Phillips)의 연구는 갈등에서 개별 지도자들의 역할에 다시 관심을 집중시켰다.[382] 힐다 존스톤의 에드워드 2세 초기 연구와 나탈리 프라이드(Natalie Fryde)의 에드워드 2세 말년 연구를 제외하면, 수년 동안 주요 역사 연구의 초점은 에드워드 2세 자신이 아니라 주요 귀족들에게 맞춰져 있었으나, 2003년과 2011년에 로이 헤인즈와 시모어 필립스가 국왕에 대한 상당한 전기를 출판했다.[383]

3. 4. 문화적 묘사

크리스토퍼 말로는 1592년경에 초연된 희곡 ''에드워드 2세''를 썼는데, 이 작품은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 개스턴의 관계를 다루면서 16세기 군주와 총애받는 신하 간의 관계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다.[385] 말로는 에드워드 2세의 죽음을 살인으로 묘사하면서 그 살해 행위와 순교 사이의 유사점을 보여준다. 비록 대본에서 에드워드 2세 살인의 실제 성격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에드워드 2세가 붉게 달군 쇠꼬챙이로 살해되었다는 전통에 따라 공연되어 왔다.[386] 말로와 동시대 인물인 제임스 6세와 프랑스의 앙리 3세에 비견되는 희곡 속 에드워드 2세의 캐릭터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리처드 2세 묘사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387] 17세기에는 극작가 벤 존슨이 미완성 작품 ''모티머의 몰락''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388]

영화 감독 데릭 저먼은 1991년 말로의 희곡을 영화로 각색하여 원작의 포스트모더니즘파스티슈를 만들었고, 에드워드 2세를 강인하고 명백히 동성애적인 지도자로 묘사하여 결국 강력한 적들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389] 저먼의 영화에서 에드워드 2세는 피에스키 편지의 전통을 따라 결국 감금에서 탈출한다.[390] 에드워드 2세의 현재 대중적 이미지는 1995년 멜 깁슨의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 그와 대조되는 모습으로도 형성되었는데, 이 영화에서 그는 약하고 암묵적으로 동성애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비단옷과 진한 화장을 하고 여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군사적으로 스코틀랜드인들과 대처할 능력이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391] 이 영화는 역사적 부정확성과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392]

영국 화가 마커스 스톤의 1872년 그림은 에드워드 2세가 개스턴과 함께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귀족들과 신하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에드워드 2세의 삶은 다양한 다른 매체에서도 사용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마커스 스톤의 그림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 개스턴''이 두 사람 사이의 동성애적 관계를 강하게 암시했지만, 이러한 측면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 그림은 1872년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처음 전시되었지만, 동성애 문제가 더욱 민감해짐에 따라 후대에는 주목받지 못했다.[393] 최근에는 감독 데이비드 빈틀리가 말로의 희곡을 바탕으로 발레 ''에드워드 2세''를 만들었는데, 1995년에 초연되었고, 이 발레의 음악은 작곡가 존 맥케이브가 2000년에 제작한 교향곡 ''에드워드 2세''의 일부를 구성한다.[384] 존 펜포드의 1984년 소설 ''가스콘''과 크리스 헌트의 1992년 소설 ''개스턴''과 같은 소설들은 에드워드 2세와 개스턴의 관계의 성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고, 스테파니 메릿의 2002년 소설 ''개스턴''은 이야기를 20세기로 옮겨 놓았다.[384]

''에드워드 2세''(1594년) 최초 출판본의 표지


베르톨트 브레히트말로의 희곡 『에드워드 2세』를 각색하여 희곡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의 생애』를 썼다.

에드워드 2세는 다음 작품에서 배우들이 연기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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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백과사전 에드워드 2세 [Edward Ⅱ] - 정복왕 에드워드 1세의 유약한 아들 네이버 지식백과
[401] 백과사전 에드워드 1세 [Edward I] - 대 브리튼 섬 통합을 시도 네이버 지식백과
[402] 서적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403]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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